
KLPGA 투어 사상 최악의 역전패, 9년에 걸친 깊은 슬럼프, 그리고 지독한 입스. 이 모든 캄캄한 터널을 지나 10년 만에 다시 출발선에 선 선수가 있다.
과거 ‘천재 소녀’로 불리며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했던 성은정(27)이다. 174cm의 당당한 체격에서 280야드가 넘는 호쾌한 장타를 날리던 그녀였다. 지난해 KLPGA 2026년 정규투어 시드 순위전에서 22위를 기록하며 올 시즌 출전권을 따냈다. 베테랑의 나이에 ‘루키’라는 꼬리표를 달고 필드에 다시 선다. 최근 진행된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긴 공백기를 뚫고 나온 단단한 내면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려주었다.

1. 28살의 나이에 다시 정규 투어 시드권을 땄다. 베테랑이지만 새롭게 출발하는 지금 심정은 어떤가?
진짜 골프 팬분들은 아직도 나를 많이 알아봐 주시고 반가워한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요즘 핫한 선수들만 아는 분들은 나를 잘 모른다.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예전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골프가 잘 안 될 때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나를 모르시는 분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은정은 2016년 아마추어 신분으로 US 여자 주니어 아마추어와 US 여자 아마추어를 한 해에 동시 석권한 최초의 선수로, 당시 ‘역대급 천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2. 2016년 BC카드 대회에서의 트리플 보기 역전패가 오랫동안 회자됐다. 본인에게는 어떤 기억인가?
그 대회가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적이 잘 안 나오기 시작하면서 몇 년 동안 그 시합에 대한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의 ‘풀스윙’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처럼 무너진 선수가 세상에 정말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걸 보며 위안을 얻었고, 이제는 그때의 기억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넷플릭스 ‘풀스윙(Full Swing)’에서는 조던 스피스나 리키 파울러처럼 정점에서 급격한 슬럼프를 겪은 선수들의 고뇌를 다룬다. 특히 전 세계 1위였던 저스틴 토머스가 컷 탈락 후 좌절하는 모습이나, 입스(Yips)로 고생하는 선수들의 심리적 압박감이 성은정에게 큰 공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3. 미국 2부 투어(앱손 투어)에서도 우승하며 승승장구하다가 갑자기 건강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다. 당시 상황은?
20살 때 자궁내막증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즌 중이라 수술을 미루기 위해 여성 호르몬 억제제를 먹었는데, 체력이 좋은 편임에도 9홀만 걸으면 허리 통증과 배가 너무 아파서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경기력이 안 좋아졌고 그 여파가 꽤 오래갔다.
(자궁내막증은 극심한 생리통과 골반통을 유발하며, 특히 운동선수에게는 코어 근육 사용과 체력 유지에 치명적이다. 호르몬 치료제는 근육량 감소나 무기력증 같은 부작용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녀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4.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골프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면 레슨만 하며 평범하게 살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무조건 좋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좋아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5. 슬럼프를 겪으며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나?
골프 선수로서의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예전과 달리, 매일 연습하며 ‘나 잘하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텼다.
(과거의 성은정은 완벽주의적인 성향과 주변의 높은 기대치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스타일이었으나, 긴 공백기를 거치며 자기 연민보다는 자기 객관화와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선택하는 성숙함을 보였다.)

6.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활동이 있다면?
달리기를 많이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15km 정도를 뛰었는데, 발이 지면에 닿는 느낌과 템포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안정됐다.
(장거리 러닝은 단순한 유산소 운동을 넘어 일종의 ‘무빙 메디테이션(Moving Meditation)’ 역할을 한다. 잡생각을 비우고 오로지 신체의 감각과 호흡에만 집중하게 하여 투어 복귀를 위한 정신적 근력을 키워준 셈이다.)

7. 멘탈 관리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나?
스코티 셰플러의 인터뷰를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성적에 따라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현 세계 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는 “나의 정체성은 골프 점수가 아니라 가족과 신앙에 있다”고 말하며, 경기 결과와 개인의 가치를 분리하는 멘탈리티로 유명하다. 성은정 역시 골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관점을 배우려 노력 중이다.)

8. 골프와 일상의 분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골프장 밖에서는 골프 생각을 아예 안 하는 ‘온오프’를 철저히 하려고 노력 중이다.
9.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선언한 것도 큰 변화라고 들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프로가 되면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면서 독립할 기회가 생겼다.
(많은 유망주가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지만, 성은정은 슬럼프 기간 중 레슨 등을 통해 스스로 생활비를 벌며 투어 복귀 자금을 마련했다. 이는 선수로서의 절실함과 책임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10. 독립 이후 본인의 마음가짐은 어떤가?
내 힘으로 골프를 하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요즘은 부모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훨씬 편하다.

11. 본인의 플레이 스타일을 자평한다면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의외로 퍼터를 제일 잘하고 연습하는 것도 좋아한다.
(장타자로 알려진 선수들은 대개 숏게임이 약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성은정은 주니어 시절부터 매치 플레이에 강했다. 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퍼팅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능력이 탁월했음을 의미한다.)

12. 드라이버 비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보통 250~260야드 정도 나가고, 마음먹고 치면 280야드까지 나간다.
(KLPGA 정규 투어 평균 드라이버 비거리가 230~240야드 내외임을 고려할 때, 260야드 이상의 비거리는 압도적인 무기다. 이는 파5 홀에서 투온(Two-on) 공략을 가능하게 한다.)

13. 최근에 기술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웨지 샷, 특히 스핀 컨트롤 공부를 많이 했다. 예전에는 샷이 워낙 좋아 숏게임에 큰 욕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정교한 ‘요리’를 할 줄 아는 선수가 되고 싶다.
(과거에는 압도적인 비거리로 코스를 힘으로 제압했다면, 이제는 거리별로 정확한 스핀량을 조절해 핀 옆에 붙이는 세밀한 운영, 즉 ‘코스 매니지먼트’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14. 투어 복귀를 준비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골프 자체를 즐기는 마음이다.

15. KLPGA 투어에서 이루고 싶은 구체적인 목표가 있나?
KLPGA 투어 우승은 당연히 목표다.

16. 해외 무대에 대한 재도전 의사도 있는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미국으로 나가 US 여자 오픈 타이틀을 갖고 싶다.
(US 여자 오픈은 성은정이 주니어 시절 가장 빛났던 무대이자,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다. 그녀에게 미국 무대는 미완의 과제와도 같다.)

17. 동료들이나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로 남고 싶나?
나처럼 힘들었던 친구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
18. 마지막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골프 인생의 최종 종착지는?
70대 할머니가 되어서도 레드티에서 골프를 즐기는, 골프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은퇴 후 골프채를 놓는 선수가 많지만, 성은정은 골프를 ‘직업’을 넘어 평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는 성적에 대한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