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코틀랜드 남서부 에어셔(Ayrshire) 해안에 자리 잡은 프레스트윅 골프클럽(Prestwick Golf Club)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대회이자 메이저 대회인 ‘디 오픈 챔피언십(The Open Championship)’의 탄생지이자, 현대 골프 코스 설계의 효시가 된 역사적인 장소다.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 글래스고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으며, 기차를 이용하면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뛰어난 접근성을 갖췄다.

프레스트윅이라는 이름은 고대 영어로 성직자를 뜻하는 ‘프레스트(prest)’와 농장을 뜻하는 ‘윅(wic)’의 합성어로, 과거 종교인들의 외딴 농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영웅 로버트 더 브루스 왕이 한센병을 앓았을 때 이곳 세인트 니니언 교회의 우물물로 치료를 받았다는 전설도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1. 57명의 열성 골퍼와 올드 톰 모리스의 조우
이곳 바닷가 링크스에 공식적인 골프 코스가 들어선 것은 1851년의 일이다. 파이프나 이스트 로디언 지역까지 원정 골프를 가야 했던 것에 지친 제임스 오길비 페얼리와 에글린턴 백작 등 57명의 열성 골퍼들이 ‘레드 라이언 술집(Red Lion Inn)’에 모여 클럽 결성을 결의했다. 이들은 새로운 코스를 조성하기 위해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당대 최고의 골퍼이자 클럽 제작자였던 ‘올드 톰 모리스(Old Tom Morris)’를 초빙했다. 이름이 같은 아들 톰 모리스와 구별하기 위해 대부분 ‘올드 톰’이라 부른다.
당시 올드 톰은 스승 앨런 로버트슨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구타페르카 공(구티 볼)의 도입 문제로 스승과 갈등을 빚고 해고된 상태였다. 프레스트윅은 연봉 39파운드를 지급하며 그를 프로 골퍼이자 클럽 및 공 제작자, 코스 관리자(Keeper of the green)로 고용했다. 이에 올드 톰은 가족과 함께 프레스트윅으로 이주하여 생애 첫 골프 코스 설계를 맡게 된다.

2. 현대 코스 설계의 교과서가 된 올드 톰 모리스의 철학
올드 톰 모리스가 조성한 초기 코스는 12홀 규모였다. 1882년에 18홀로 확장되었지만, 현재도 1851년 당시의 6개 오리지널 그린과 3개의 초기 홀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당시에는 굴착기 등 대형 중장비가 없었다. 올드 톰은 외바퀴 손수레와 삽 두 자루, 그리고 호주머니에 가득 채운 깃털만으로 코스를 설계했다. 자연적인 모래 언덕(사구) 지형을 거닐며 그린이 들어서기 적합한 곳에 깃털을 떨어뜨려 위치를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설계 철학은 자연 지형을 훼손하거나 깎아내는 대신 둔덕을 그대로 살려, 골퍼에게 “넘어가거나 돌아가라”는 끊임없는 선택과 과제를 던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철학 속에서 공략 지점이 보이지 않는 ‘블라인드 홀(Blind Hole)’과 철도 굄목을 세워 벙커 벽을 지탱한 ‘굄목 벙커(Sleeper-faced Bunker)’ 등 프레스트윅을 대표하는 설계 양식이 탄생했다. 이 혁신적이고 전략적인 설계는 훗날 세계적인 현대 코스 설계가 피트 다이(Pete Dye)가 3년간 프레스트윅을 연구하며 자신의 설계 철학을 완성했을 만큼 코스 설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올드 톰은 모래 위에 쏟아진 잔디가 더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모래, 모래, 그리고 더 많은 모래”라는 철학 아래 현대 링크스 코스 관리의 핵심인 ‘모래 톱드레싱’ 기법을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3. 디 오픈의 창설과 클라레 저그의 탄생 비화
프레스트윅이 세계 골프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는 단연 ‘디 오픈(The Open)’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1859년, 당대 최고의 골퍼로 군림하던 앨런 로버트슨이 사망하자 골프계는 그의 뒤를 이을 진정한 챔피언을 가려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를 위해 1860년 10월 17일, 프레스트윅에서 역사적인 제1회 디 오픈이 개최되었다. 당시 대회가 10월에 열린 이유는 잔디 깎는 기계가 발명되기 전이라 잔디 성장이 멈추는 가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첫 대회는 단 8명의 프로 골퍼가 참가해 하루 동안 12홀 코스를 세 바퀴(총 36홀) 도는 일정으로, 점심시간을 포함해 단 4시간 반 만에 종료되었다. 첫 우승자는 머셀버러 출신의 장타자 윌리 파크로, 홈 코스의 올드 톰 모리스를 2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부상으로는 빨간 모로코산 가죽에 은 버클이 장식된 ‘챌린지 벨트’가 수여되었다. 이듬해인 2회 대회부터 아마추어 골퍼에게도 문호를 개방(Open)하면서 오늘날의 ‘디 오픈’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초기 챌린지 벨트에는 ‘3회 연속 우승자에게 영구 소유권을 준다’는 규정이 있었다. 올드 톰 모리스의 아들인 영 톰 모리스가 1868년부터 1870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휩쓸며 이 벨트를 영구히 소유하게 되었다. 수여할 우승 트로피가 사라진 탓에 1871년에는 아예 대회가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태 수습을 위해 1872년, 프레스트윅은 세인트 앤드루스의 R&A, 에든버러 골프클럽과 함께 각각 10파운드씩을 갹출하여 새로운 트로피를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오늘날 디 오픈의 상징인 ‘클라레 저그(Claret Jug, 정식 명칭: 골프 챔피언 트로피)’다. 1872년 대회에서도 영 톰 모리스가 우승하며 4연패 신화를 썼으나 트로피 제작이 늦어진 탓에 당시에는 금메달을 받아야 했고, 이후 완성된 클라레 저그 뒷면에 맨 처음 이름이 새겨지는 영광을 안았다.

4. 관중 통제 불능이 부른 디 오픈과의 작별
프레스트윅은 1860년부터 1925년까지 총 24회의 디 오픈을 개최했다. 그러나 1925년 대회를 끝으로 더 이상 디 오픈을 열지 못하게 된다. 당시 맥도널드 스미스가 선두를 달리자 무려 1만 5000 명에서 1만 8000 명에 달하는 엄청난 갤러리가 작은 링크스 코스로 몰려들었다. 비좁은 코스에 관중이 꽉 들어차면서 갤러리 통제가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선수가 친 공이 관중을 맞고 방향이 튕겨 바뀌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짐 반스가 75파운드의 상금과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나, 프레스트윅 측은 부지가 비좁은 한계(좌측은 바다, 우측은 철도, 인근은 공항)를 스스로 깨닫고 향후 개최 포기 의사를 밝혔다.
5.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프레스트윅의 악명 높은 시그니처 홀
비록 디 오픈 순회 코스에서는 제외되었으나, 프레스트윅은 지금도 초창기의 맹렬한 난이도와 원형을 보존하며 골퍼들의 상상력과 도전 의식을 시험하고 있다.
- 1번 홀 (Railway):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프닝 홀 중 하나로, 코스 우측을 따라 철길이 바짝 붙어 있어 약간의 슬라이스만 나도 공이 기찻길로 넘어가는 공포의 아웃오브바운즈(OB) 구역이다. 초창기 1851년 조성 당시에는 578야드의 긴 전장(파6 추정)으로 설계된 올드 톰의 파격이 돋보인 곳이며, 1870년 영 톰 모리스가 골프 역사상 최초의 알바트로스(한 홀에서 3타 줄임)를 기록한 홀이기도 하다.
- 3번 홀 (Cardinal): 프레스트윅의 특징이 응축된 500야드 파5, 우측 도그레그 홀이다. 티샷 지점 230야드 전방에 나무 굄목으로 벽을 세운 거대한 사구 벙커인 일명 ‘카디널 벙커’가 방어막처럼 도사리고 있어 수많은 골퍼가 곤욕을 치르는 곳이다.
- 5번 홀 (Himalayas): 전장 200야드가 넘는 완벽한 블라인드 파3 홀이다. 그린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모래 언덕(히말라야)과 굄목 벽 위로 솟은 방향 마커에만 의존해 바람을 뚫고 샷을 날려야 한다.
- 15번 홀 (Narrows): 이름 그대로 매우 좁은 페어웨이로 블라인드 티샷을 날려야 한다. 뒤쪽으로 심하게 흘러내리는 그린의 경사 때문에 두 번째 샷 역시 둔덕을 넘기는 정확한 거리 조절이 요구된다.
- 17번 홀 (Alps): 초기 12홀 시절의 2번 홀이었으며,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챔피언십 홀이다. 두 번째 샷은 가파른 언덕 위를 넘겨 치는 블라인드 샷이어야 하며, 거리가 짧을 경우 그린 앞을 가로막은 악명 높은 ‘사하라(Sahara) 벙커’의 모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밖에도 그리스 신화 속 낙원을 의미하는 6번 홀 ‘엘리시안 필즈(Elysian Fields)’는 불멸의 삶을 얻은 올드 톰 모리스 등 골프 선구자들이 아직도 거닐고 있을 법한 숭고한 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레스트윅 골프클럽은 결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구시대적 코스가 아니다. 첨단 장비로 무장한 현대의 수준급 골퍼들에게도 변함없이 가혹한 도전을 선사하는 현역 코스다.
수천 년에 걸쳐 자연이 빚어낸 거친 지형 속에서 현대 골프와 디 오픈의 웅장한 기원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은, 위대한 선구자들의 발자취가 살아 숨 쉬는 골프 역사의 타임캡슐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