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성지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그곳에서 북해의 거친 파도 소리를 길잡이 삼아 남쪽으로 11km, 차로 약 13분 정도를 달리면 A917번 도로 끝에서 마법 같은 장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매서운 바닷바람과 끝없이 펼쳐진 웅장한 모래언덕, 그리고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듯한 대지. 바로 전 세계 골퍼들의 버킷리스트이자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현대적인 걸작, ‘킹스반스 골프 링크스(Kingsbarns Golf Links)’다.

2000년 7월에 개장한 이 코스는 얼핏 보면 스코틀랜드의 그 어떤 오랜 코스 못지않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곳은 인간의 끝없는 열정과 상상력이 자연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현대 골프의 마법이다.

제1장: 모래바람 속에 묻혀있던 200년의 시간과 부활 

킹스반스라는 이름은 우연이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1292년, 스코틀랜드의 존 왕(King John of Scots)은 왕의 곡간(king’s barns)에 저장된 귀중한 곡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았고, 코스의 이름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했다.

이 땅에서 처음으로 골프채를 휘두른 기록은 17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프에 매료된 지역인들은 1815년 킹스반스 골프협회를 설립하고 1850년까지 9홀 코스에서 라운드를 즐겼다. 1922년에는 윌리 오크터로니(Willie Auchterlonie)의 설계로 코스가 새롭게 재건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이 평화로운 코스를 비켜가지 않았다. 국가 방어의 명목으로 해안가 코스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었고, 사람의 발길이 끊긴 땅은 다시 거친 초원과 농지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긴 휴면에 들어간 킹스반스를 깨운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난 후였다.

제2장: 대지의 연금술사들, 평범한 땅에 마법을 부리다 

거친 농지로 방치되었던 220에이커의 땅이 오늘날 전 세계 100대 코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톱 100 코스 중 5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배경에는 두 명의 미국인이 있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뛰어난 개발자 고(故) 마크 파시넨(Mark Parsinen)과 천재적인 코스 설계가 카일 필립스(Kyle Phillips)는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뚜렷한 목표 아래 1997년 11월부터 마법의 향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국과 아일랜드 전역의 유서 깊은 베스트 링크스 코스들을 직접 답사하며 스케치하고 사진을 찍어 영감을 모았다. 모래가 존재하지 않던 밋밋한 지형에는 트럭으로 엄청난 양의 모래를 실어 날랐고, 불도저를 동원해 무려 30만 5822 입방 미터의 흙을 깎고 다듬어 스코틀랜드 해안 특유의 극적인 3단 사구(dunescape)를 완벽하게 창조해냈다. 이들은 오직 ‘골프 코스’ 자체에만 모든 것을 걸었다. 코스 주변에 고급 주택단지도, 화려한 리조트나 대형 호텔도 짓지 않았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클럽하우스조차 작고 절제된 형태로 지어, 골퍼들의 모든 시선과 감각이 코스와 자연에만 집중되도록 유도했다.

제3장: 바다를 품은 18홀의 서사시, 홀마다 깃든 모험 

킹스반스의 흔들림 없는 모토는 ‘바다를 품다(Embracing the sea)’이다. 북해의 2.9km 해안선을 따라 오롯이 설계된 이 코스는 18개 모든 홀에서 압도적인 바다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축복받은 구장이다. 넓고 너그러운 페어웨이는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지만, 역동적으로 굽이치는 언듈레이션 그린은 방심하는 순간 매서운 응징을 가한다.

여정은 코스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1번 홀(파 4)에서 시작된다. 두 개의 벙커가 자리한 굽이치는 페어웨이 너머로 북해가 첫인사를 건네며 앞으로 펼쳐질 모험을 예고한다. 

2번 홀은 내리막 티샷으로 시작되는데, 넓은 그린 우측에 자리 잡은 배고픈 벙커 3개가 티샷은 물론 빗나간 퍼트까지 삼켜버리려 도사리고 있다. 가장 낮은 지점인 3번 홀(파 5)은 해안선과 인접한 첫 번째 홀로, 그린 앞에는 무려 3미터 깊이에 16m 길이를 가진 무시무시한 벙커가 입을 벌리고 있어 자칫하면 캐디의 구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핸디캡 1번인 7번 홀은 오르막에 심한 경사가 져 있으며 끊임없이 공을 왼쪽으로 밀어내 골퍼들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코스의 백미 중 하나인 6번 홀(파 4)은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원형 극장(Amphitheater)이다. 경사가 심한 2단 그린이 악명 높지만, 2012년 알프레드 던힐 링크스 챔피언십에서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가 무려 48미터 길이의 기적 같은 이글 퍼트를 성공시켜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반을 마무리하는 9번 홀에서는 한때 세계 1위에 올랐던 잉글랜드 골퍼 리 웨스트우드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2003년 대회 당시 10번 홀에서 출발해 이곳을 마지막 홀로 맞이한 그는 두 번째 샷을 그대로 홀에 집어넣으며 알바트로스를 기록해 62타라는 환상적인 스코어를 완성했다.

드라마틱하고 스릴 넘치는 후반전은 12번 홀(파 5)에서 절정에 달한다. 606야드의 압도적인 길이를 자랑하는 이 홀은 바위투성이 해안선을 껴안고 있어 아찔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티 샷, 레이업, 어프로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바다의 위협과 유혹을 이겨내야 하는 최고 수준의 전략 홀이다.

미학적 아름다움과 잔혹함이 공존해 ‘미녀와 야수’로 불리는 15번 홀(파 3)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바다 위로 돌출된 그린을 향해 185~220야드를 날려야 하는 극강의 난이도를 뽐낸다. 강한 맞바람이 불어올 때는 골프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홀로 돌변하지만, 뷰만큼은 카메라 셔터를 멈출 수 없게 만든다. 11개의 벙커와 그린 곁에 숨겨진 좁은 시냇물(burn)이 도사리는 16번 홀을 지나면, 마침내 18번 홀의 웅장한 피날레가 기다린다. 마지막 티 샷을 페어웨이에 안착시킨 후, 깊은 캄보 계곡(Cambo burn) 너머 클럽하우스 쪽 언덕 위의 아득한 핀을 향해 두 번째 샷을 날려야 한다. 이때 계곡 위로 놓여 있는 1700년대의 작은 돌다리는 킹스반스가 겪어온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상징하는 훌륭한 랜드마크다.

제4장: 프로를 긴장시키고 아마추어를 미소 짓게 하는 무대 

킹스반스는 회원제가 없는 철저한 ‘페이 앤 플레이(pay-and-play)’ 퍼블릭 코스로 운영된다. 애초에 아마추어 골퍼들이 스코틀랜드 해안의 정취를 느끼며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지만, 정상급 골퍼를 위한 챔피언십 세팅에서는 세계 최고의 프로 선수들의 한계를 매섭게 시험한다.

매년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 카누스티와 함께 유러피언 투어 ‘알프레드 던힐 링크스 챔피언십’을 공동 개최하고 있는데, 이 대회는 세계 최정상 프로들과 비즈니스계, 스포츠계의 유명 인사(아마추어)들이 함께 섞여 걷는 독특한 프로암 포맷을 띤다. 

2017년에는 ‘리코 브리티시 여자 오픈(현 AIG 위민스 오픈)’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특히 한국의 김인경 선수가 이곳에서 메이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려 국내 골프 팬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선사한 바 있다. 이 밖에도 2010년 디 오픈 지역 예선과 18세 이하 대항전인 자크 레글리스 트로피(Jacques Léglise Trophy)를 치러내며 명실상부한 토너먼트 코스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곳의 숨은 비결은 바로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코스 관리다. 킹스반스의 23명의 코스 관리 직원 중  7명은 오직 디봇(divot)만을 매일같이 보수하는 전담 부서 소속이다. “우리의 코스는 매일이 토너먼트 준비 상태여야 한다”는 굳은 신념 덕분에, 일반 아마추어들도 대회를 치르는 프로들과 똑같은 완벽한 잔디 위에서 샷을 할 수 있다. 피터 도슨 전 R&A 총무가 디 오픈 베뉴인 뮤어필드의 상시 완벽한 코스 관리를 극찬한 바 있는데, 동료 언론인 브라이스 리치는 킹스반스의 결점 없는 컨디션이 바로 그 뮤어필드와 동급이라고 극찬했다.

에필로그: 완벽한 여정을 위한 조언 

킹스반스에서 만족스러운 라운드를 하기 위한 비밀 노트는 이렇다. 첫째, 이곳의 굴곡진 그린은 무척 빠르고 정직하게 구르기 때문에, 1번 홀 티오프 전 곁에 있는 연습 그린에서 반드시 스피드를 체감하고 퍼트 감각을 조율해야 한다. 둘째, 자신의 실력에 맞는 티 박스를 현명하게 선택하라. 비거리가 길지 않은데 무리해서 챔피언 티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티를 골랐을 때, 넓은 페어웨이와 환상적인 뷰가 주는 킹스반스 본연의 스릴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2012년 브랜든 그레이스(Branden Grace)가 세운 코스 레코드는 무려 60타다.

킹스반스의 라운드 비용은 “왕의 몸값(a king’s ransom)”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 경험의 가치는 1페니도 아깝지 않다. 가슴 벅찬 18홀 라운드를 마친 후에는 작지만 고풍스러운 클럽하우스에 앉아 킹스반스의 명물 식사 메뉴인 ‘칠리 볼(Chilli Bowl)’을 맛보는 것도 좋다. 온몸을 녹이는 매콤하고 진한 맛은 환상적인 골프 여정에 가장 완벽한 방점을 찍어줄 것이다.

미국의 창의성과 토목 공학,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숭고한 링크스 전통이 어우러진 킹스반스 골프 링크스는 눈부시다. 진정한 골프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서사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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