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라라사발은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벌어야 하는 돈, 그리고 잔인하게 끊어진 컷 통과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지막으로 주말 라운드에 진출한 것은 지난 2월 초 카타르 대회가 마지막이었다. 그 간절함이 밀려온 순간부터, 견고했던 베테랑의 골프는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매주 리더보드에 찍히는 대회 결과와 스코어만 접하는 팬들은 선수들이 그 숫자를 만들어내기까지 어떤 심리적 사투를 벌이는지 알기 어렵다. 이번 주 DP 월드투어 KLM 오픈에서 라라사발이 털어놓은 고백은 프로 골퍼의 화려한 외면 뒤에 숨겨진 잔인한 내면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최고의 샷, 최악의 결말
올해 43세인 스페인의 파블로 라라사발은 투어 무대에서만 22년을 버텨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DP 월드투어 통산 9승을 수확했고, 한때 세계랭킹 50위 이내에 진입했던 정상급 골퍼다.
암스테르담 인근 인터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린 2라운드 초반까지만 해도 그의 경기력은 눈부셨다. 라라사발 스스로도 “내 커리어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샷 감각이 좋았다”고 돌아봤을 정도다. 1라운드에서 이븐파(71타)를 기록한 그는 2라운드 첫 홀을 보기로 출발했으나, 이내 무서운 버디 몰아치기를 시작했다. 11번, 12번, 15번 홀에서 징검다리 버디를 낚았고, 2번 홀에서는 그린 왼쪽에서 시도한 칩샷이 그대로 홀컵에 빨려 들어가며 환호했다.
그 시점에서 그는 당일 라운드 3언더파, 대회 합계 3언더파를 달성하며 상위권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최근 8개 대회 연속 컷 탈락이라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던 그였기에, 그리고 올 시즌 최고 성적이 공동 33위에 불과했기에 더욱 감격적인 스코어였다.
순식간에 찾아온 악몽,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그러나 파5 3번 홀에서 첫 번째 균열이 생겼다. 티샷과 두 번째 샷을 잘 보내고 핀까지 125야드를 남겨둔 상황, 그가 날린 세 번째 샷이 야속하게 물에 빠지며 더블보기를 범했다.
진짜 악몽은 5번 홀에서 찾아왔다. 약 18피트 거리의 버디 퍼트를 놓친 것까지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1피트 7인치(약 50cm) 거리의 파 퍼트가 홀을 외면했다. 당황한 그는 곧바로 1피트 9인치 거리의 보기 퍼트를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네 번의 퍼트 끝에 홀아웃하며 또 한 번의 더블보기를 적어냈다. 2피트(약 60cm)도 안 되는 짧은 퍼트를 한 홀에서 세 번이나 놓친 것이다.
“480개 대회를 뛰었는데도 몸이 떨렸다”
경기 후 인터뷰 구역에 들어선 라라사발은 참담했던 당시 심정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11번째 홀까지는 내 인생 최고의 골프를 치고 있었습니다. 합계 3언더파를 기록 중이었고, 리더보드를 보며 버디 한두 개만 더 잡으면 주말에 우승 경쟁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3번 홀의 더블보기 이후, 마음속 깊이 눌러 담았던 생존에 대한 공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컷 통과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가 불가능했습니다. 마지막 컷 통과가 2월 첫째 주 카타르였고, 이후 8개 대회 연속으로 주말에 짐을 쌌으니까요. 순간 내가 투어에서 몇 대회를 뛰었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480개가 넘는 대회를 치른 베테랑인데도 사지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골프가 얼마나 잔인하고, 때로는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 경기인지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5번 홀에서 나온 치명적인 포퍼트(4-putt) 역시 기술적 실수가 아닌 심리적 붕괴 때문이었다. 그는 “전부 떨림 때문이었다. 압박감에 2피트 거리에서 공을 똑바로 보낼 수가 없었다. 두 번째 퍼트는 홀조차 스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마지막 홀에서도 뇌를 지배한 압박감은 멈추지 않았다. “공이 페어웨이 한가운데에 있었고,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오른쪽 해저드로는 절대 보내지 마’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스쳤다. 왼쪽으로 40~50피트나 여유 공간이 있었는데도, 결국 9번 아이언 샷을 깃대 왼쪽 30야드 밖으로 사정없이 당겨 치고 말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다”
취재진의 이어진 질문에 라라사발은 프로 골퍼에게 ‘컷 통과’가 갖는 진짜 의미를 설명하며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책임져야 할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480개 대회를 치르는 동안 돈을 의식하며 플레이했던 적은 투어 초반 5개 대회와 최근 5개 대회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통장에 찍힐 상금을 생각하며 치는 골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는 투어 생활의 냉혹한 생존 법칙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이 경기는 결국 끝까지 버티고 싸우는 게임입니다. 컷을 4타 차로 놓치든 6타 차로 놓치든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고 버텨야 합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마지막 5개 홀에서는 밀려오는 긴장감이 끝내 저를 집어삼켰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 다시 싸운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라라사발은 전광판의 리더보드를 가만히 확인했다. 이날 2라운드는 일몰로 인해 순연되어 토요일 오전까지 이어지게 됐다. 당시 그는 예상 컷라인에 2타 뒤져 있었지만, 끝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나 주말 경기를 치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은 지금 내게 돈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내 골프 자체는 어느 때보다 훌륭합니다. 특히 롱게임은 과거 내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던 시절보다 지금이 더 정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싸우는 것뿐입니다. 내일 아침 바람이 조금 도와준다면 좋겠습니다.”
라라사발의 솔직한 고백은 전 세계 프로 골퍼들의 삶이 대중에게 비치는 화려한 조명과는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수백 개의 대회를 누빈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조차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당장의 생계가 걸린 컷 라인 앞에서는 손이 떨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자비 없는 컷오프와 상금의 압박, 그것이 바로 프로 골프가 감추고 있는 가장 차갑고 냉혹한 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