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서 약한 팀이 강한 팀에게 지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실력 차이다. 진짜 비극은 가능성과 결과 사이의 간극에서 탄생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무능해서 몰락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뛰어났기에 그의 몰락은 더 큰 비극이 됐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역시 마찬가지다. 가능성이 없었다면 실패도 비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튀르키예의 탈락도 어쩌면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이후 24년 만에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아르다 귈레르와 케난 일디즈를 비롯해 유럽 정상급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32강 진출은 결코 과한 기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는 냉혹했다.
호주의 촘촘한 수비에 막혀 0대2로 졌다. 그리고 파라과이에 0대1로 졌다. 그것도 상대가 퇴장으로 10명이 된 상황에서 끝내 골문을 열지 못했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선제골을 내준 뒤 튀르키예는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을 파라과이 진영에서 보냈다. 공은 튀르키예가 가졌고 공격도 튀르키예가 했다. 관중들은 “이번에는 들어가겠지”라고 생각했다. 선수들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축구는 기대가 아니라 결과로 말한다.
튀르키예 감독은 경기 후 “두 경기에서 60개가 넘는 슈팅을 기록하고도 한 골도 넣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이 패배를 단순한 불운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튀르키예는 상대가 짜놓은 질서를 흔들지 못했다. 공을 소유했지만 상대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축구에서 진짜 강팀은 공을 오래 소유하는 팀이 아니다. 상대가 준비한 계획을 망가뜨리는 팀이다. 예상 가능한 공격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흔드는 팀이다.
한국 축구도 이 장면을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는 없다. 멕시코전 패배 역시 한 번의 실수에서 시작됐지만, 결국 월드컵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힘이 있는 팀과 그렇지 못한 팀을 가려낸다.
튀르키예 선수들이 흘린 눈물은 가능성을 보여주고도 결과로 완성하지 못한 팀의 눈물이다.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 눈물은 한국 축구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 경기를 바꿀 수 있는 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