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꼭 내가 잘할 때 성과를 거두는 스포츠가 아니다.
상대가 잘하는 것을 못하게 만들 때도 성과는 나온다. 어쩌면 월드컵은 리그보다 훨씬 병법의 세계에 가깝다. 짧은 시간, 제한된 전력, 단 한 번의 실수가 운명을 바꾼다.
가나와 잉글랜드의 0-0 무승부를 보면서 손자병법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선위불가승 이대적지가승(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
먼저 스스로 패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고, 적이 무너질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가나 감독 카를로스 케이로스의 축구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문장을 찾기 어렵다.
한국 팬들에게 케이로스는 썩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인물은 아니다. 이란 대표팀 감독 시절 한국과 여러 차례 신경전을 벌였고, 경기 뒤 이른바 ‘주먹감자’ 논란도 일으켰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포르투갈의 황금세대를 키워낸 지도자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오른팔이었다. 이후 포르투갈,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랍에미리트, 이란, 콜롬비아, 이집트, 카타르, 오만을 거쳐 지금은 가나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축구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거의 한 바퀴를 돈 셈이다.
그의 축구는 늘 비슷하다.
먼저 실점하지 않는다. 라인을 정비한다. 공간을 없앤다.
그리고 상대가 조급해지기를 기다린다.
잉글랜드전이 딱 그랬다. 가나는 공을 내줬지만 공간은 내주지 않았다. 벨링엄과 케인이 가장 편안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구역을 지워버렸다. 잉글랜드는 볼을 오래 소유했지만 경기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월드컵에서는 이런 축구가 생각보다 중요하다.
최근 스웨덴은 네덜란드에 1-5로 무너졌다. 스웨덴이 그렇게까지 전력 차이가 나는 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붙었고, 네덜란드가 가장 좋아하는 리듬을 허락했다.
호주도 비슷했다.
튀르키예를 상대로는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고 공간을 지우며 승리했다. 그런데 미국전에서는 조금 더 맞불을 놓으려 했다. 자신들이 가장 날카롭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스스로 무디게 만든 셈이다.
강팀을 상대하는 약팀의 축구는 때로 답답해 보인다. 공도 적게 갖고, 공격도 적게 한다.
하지만 월드컵은 미인대회가 아니다. 누가 더 아름답게 축구했는지를 평가하는 무대가 아니다.
살아남는 팀이 강한 팀이다.
케이로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이다.
그는 강팀을 이기려고 하기 전에 강팀이 잘하는 것을 못하게 만든다. 상대의 장점을 지우고,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상대를 조급하게 만든다.
손자가 말한 “먼저 패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라”는 병법을 현대 축구에서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는 감독 가운데 한 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나의 0-0은 단순한 무승부가 아니다.
강팀과 약팀이 싸우는 또 하나의 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명이다.
월드컵은 결국 축구 경기인 동시에 병법의 세계이기도 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