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결국 ‘서사(Narrative)’의 산물이다. 아무리 정교한 샷이 쏟아지고 언더파 행진이 이어져도, 그 안에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가 없다면 대중은 채널을 돌린다. 2026시즌을 앞둔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는 지금 그 거대한 변곡점 위에 서 있다. 글로벌 투어로 성장하며 세계 여자골프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LPGA투어의 경기력은 이미 증명된 상태다. 이제 필요한 건 ‘누가 우승했느냐’가 아니라 ‘왜 그가 우승해야 했는가’에 대한 답이다. 2026년, 여자 골프의 향후 10년을 결정지을 5가지 결정적 장면을 짚어본다.

① 크레이그 케슬러의 승부수: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의 전환

2026시즌 기로에 선 LPGA의 중심에는 크레이그 케슬러(Craig Kessler) 커미셔너가 있다. 그는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선 스포츠 비즈니스 및 미디어 전략가다. PGA 오브 아메리카와 톱골프(Topgolf)에서 운영 및 경영을 총괄하며 현장과 자본의 생리를 익혔다. 2023년 LPGA 최고 운영 책임자(COO)로 합류한 그는 중계권 구조를 전면 개편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대폭 확대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25년 7월, 몰리 마르쿠 사마안(Mollie Marcoux Samaan)의 뒤를 이어 LPGA 커미셔너에 공식 취임했다. 케슬러의 목표는 명확하다. 글로벌 자본 유치와 혁신을 통해 LPGA를 단순한 ‘경기 중심’ 투어에서 전 세계 팬들이 열광하는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 첫 단추가 바로 ‘WTGL(여자 시뮬레이터 리그)’의 출범이다.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매킬로이가 주도한 TGL의 여자 버전인 이 리그는 MZ세대와 디지털 네이티브를 정조준한다. 골프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속도감 있는 경기는, 보수적인 골프 팬덤을 확장하려는 케슬러의 야심작이다. 필드 위에서는 사우디 자본(골프 사우디)을 유치해 400만 달러 규모의 특급 대회를 신설하고, 셰브론 챔피언십의 개최지를 옮기는 등 ‘돈이 돌고 관객이 몰리는’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② ‘얼굴’ 넬리 코다, 지배자의 위엄을 회복할 것인가

한 시즌 7승. 2024년 넬리 코다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여제’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2025년, 그는 무관의 제왕으로 내려앉았다. 통계 수치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공은 홀을 외면했다.

LPGA 투어 입장에서 ‘스타플레이어의 부재’는 뼈아프다. 리디아 고는 “매주 우승자가 바뀌는 평준화는 투어의 깊이를 보여주지만, 마케팅 측면에서는 양날의 검”이라고 평했다. 타이거 우즈를 모르는 사람도 골프를 보게 하듯, 넬리 코다라는 아이콘이 다시 독주 체제를 갖춰야 리그의 스토리가 선명해진다. 코다는 “골프는 한 끗 차이다. 작년엔 운이 따랐고, 올해는 그렇지 않았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하지만 2026년, 그가 다시 리더보드 최상단을 점령하느냐는 LPGA가 ‘대중적인 리그’로 남을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다.

③ 지노 티띠꾼, 기록을 넘어 ‘시대’를 증명하라

2025년 LPGA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지노 티띠꾼(태국)이었다. 아니카 소렌스탐의 최저 타수 기록을 갈아치우며 베어 트로피를 가져갔고, 세계 랭킹 1위 탈환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메이저 우승’이라는 마지막 퍼즐이 빠져 있다. 티띠꾼의 스윙은 완벽에 가깝고 경기 운영은 노련하다. 하지만 메이저 대회 일요일 오후, 압박감을 이겨내는 ‘킬러 본능’에선 아쉬움을 남겼다. 2026년 티띠꾼이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면, 그는 단순한 강자를 넘어 ‘티띠꾼 시대’를 선포하게 된다. 이는 LPGA의 기술적 정점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될 전망이다.

④ ‘흥행 보증수표’ 찰리 헐, 성적이 인기를 따라잡을 때

영국의 찰리 헐은 현재 LPGA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다. 필드 위에서 담배를 물거나 갤러리와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그의 캐릭터는 정적인 여자 골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케슬러 커미셔너조차 “헐처럼 골프장 밖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스타가 필요하다”고 치켜세울 정도다. 문제는 우승 횟수다. 인기는 이미 메이저 10승급이지만, 정작 메이저 우승컵이 없다. 2025년 AIG 여자 오픈에서도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2026년, 헐이 메이저 정상에 서는 순간 LPGA의 외연은 폭발적으로 확장된다. ‘인기만 많은 선수’라는 꼬리표를 떼는 순간, 그는 투어의 진정한 구세주가 된다.

⑤ 한국 여자 골프, ‘K-시스터즈’의 르네상스는 오는가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은 “우리는 다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가”다. 박세리로부터 시작해 박인비, 고진영으로 이어졌던 한국 선수의 독주 시대는 잠시 멈춘 상태다. 하지만 2026년은 한국 골프에 새로운 기회의 해다. KLPGA를 좁다 하고 누비는 황유민, 이동은 같은 ‘공격적인 천재’들이 LPGA의 문을 두드린다. 이들은 과거 선배들과는 결이 다르다. 단순히 성적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LPGA 입장에서도 한국은 포기할 수 없는 ‘황금 시장’이다. 한국 기업들의 후원과 열성적인 팬덤은 투어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새로운 한국인 스타의 등장은 침체된 국내 골프 열기에 다시 불을 지피고, LPGA 투어의 글로벌 다양성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 된다. 2026년은 케슬러의 비즈니스 전략과 선수들의 서사가 만나 여자 골프의 새로운 10년을 여는 첫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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