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우(31)의 2026시즌 초반 기세가 무섭다. 단순한 상승세를 넘어 ‘무결점 골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출전한 3개 대회에서 모두 톱10에 진입했고, 시즌 개막 한 달 만에 상금 25억 원(약 171만 달러)을 돌파했다. 세계 최고의 골퍼들이 모이는 PGA 투어에서 우승 없이도 이토록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 ‘열광의 잔치’에서 펼쳐진 노보기 플레이
김시우는 9일(한국시각)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TPC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코스(파71)에서 막을 내린 PGA 투어 WM 피닉스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 3개를 낚으며 3언더파 68타를 쳤다. 최종 합계 15언더파 269타를 기록한 그는 ‘세계 1위’ 스코티 셰플러(미국)와 함께 공동 3위에 이름을 올렸다.

피닉스오픈은 ‘골프 해방구’라 불릴 만큼 관중의 소음과 환호가 극에 달하는 대회다. 멘탈이 흔들리기 쉬운 환경에서도 김시우는 나흘 내내 흔들림 없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특히 마지막 날 보여준 ‘노 보기’ 플레이는 그의 집중력이 얼마나 날카롭게 서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성적으로 김시우는 지난 1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공동 6위,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 준우승에 이어 3개 대회 연속 톱10이라는 쾌조의 상승세를 보였다. 시즌 개막전인 소니 오픈(공동 11위)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모든 대회에서 우승권을 위협한 셈이다.

◇ 데이터가 말하는 ‘역대급 샷감’
김시우의 성적표 이면에는 경이로운 통계가 숨어 있다. 현재 그의 경기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정교한 아이언 샷’이다.
PGA 투어 공식 통계에 따르면 김시우의 SG: Approach(그린 적중 이득 타수)는 투어 전체 4위에 올라 있다. 동료 선수들보다 라운드당 2타 가까운 이득을 보고 있다. 그린 적중률(GIR) 역시 77.3%로 최상위권이다.
과거 김시우의 스윙은 백스윙 탑에서 클럽이 뒤로 쳐지는 ‘레이드 오프(laid off)’ 동작이 심해 일관성 면에서 숙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내 골프 인생에서 지금처럼 클럽 헤드의 위치가 잘 느껴진 적이 없다”고 고백할 만큼 완성도 높은 스윙을 구사한다. 불필요한 동작을 걷어내고 궤도를 단순화한 결과다.
◇ 11개 홀 연속 파, 아쉬움 뒤에 숨은 실리
피닉스오픈 최종일, 김시우는 초반 1번과 3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한때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4번 홀부터 14번 홀까지 11개 홀 연속으로 파 세이브에 그친 것이 발목을 잡았다. 공격적인 핀 공략보다는 안전한 그린 중앙을 노리는 전략을 택했으나, 연장 승부를 벌인 크리스 고터럽(미국)과 마쓰야마 히데키(일본)의 몰아치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공동 3위 상금 43만 9680달러를 추가하며 시즌 누적 상금을 170만 8755달러(약 25억 원)로 늘렸다. 상금 랭킹과 페덱스컵 포인트 모두 ‘톱 5’권을 형성했다.

◇ 고터럽의 돌풍과 마쓰야마의 비극
대회 우승은 미국의 신예 크리스 고터럽에게 돌아갔다. 고터럽은 마지막 6개 홀에서 5개의 버디를 몰아치는 신들린 퍼팅으로 마쓰야마 히데키를 연장으로 끌어들였다. 연장 첫 홀인 18번 홀(파4)에서 마쓰야마의 티샷이 물에 빠지는 행운까지 겹치며 고터럽 시즌 가장 먼저 2승 고지에 올랐다.
일본의 골프 영웅 마쓰야마 히데키는 17번 홀까지 선두를 지키며 대회 세 번째 우승을 눈앞에 뒀으나, 18번 홀에서 티샷 실수로 보기를 범하며 무너졌다.
◇ 2월 ‘골든 스윙’과 3월의 약속
김시우의 여정은 이제부터가 진짜다. 이번 주부터 PGA 투어는 상금 2000만 달러(약 290억 원)가 걸린 특급 대회 ‘시그니처 이벤트’ 구간에 진입한다. AT&T 페블비치 프로암 (2월 12일~15일)와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 (2월 19일~22일), 이 두 대회는 참가 선수가 적고 컷 탈락이 없는 대회로, 현재 김시우의 샷감이라면 더 많은상금과 포인트를 획득할 절호의 기회다. 특히 3월에는 그가 2017년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던 ‘제5의 메이저’ 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기다리고 있다.
◇”가장 조용한 폭풍, 가장 따뜻한 원동력”
최근 김시우의 골프에는 든든한 ‘가족’의 온기가 묻어난다. 화려한 세리머니나 요란한 언론 노출 없이도 묵묵히 기록을 경신해 나가는 힘의 원천은 바로 화목한 가정에 있다.
KLPGA 투어 스타였던 아내 오지현과의 결혼,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탄생은 김시우를 단단한 ‘가장’으로 성장시켰다. 필드 위에서 때때로 불같던 성미는 가장의 무게감을 기분 좋게 짊어지며 차분하고도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치환됐다.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골프채를 잡는 손끝에 절실함과 여유를 동시에 불어넣은 셈이다.

비록 이번 대회에서 단독 선두를 유지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가정을 꾸린 뒤 맞이한 제2의 전성기는 이전보다 훨씬 견고하다. 김시우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한다. ‘한국 골프의 전설’ 최경주가 세운 PGA 투어 한국인 최다승(8승)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