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속의 벌(Bee), 아빠를 깨우다”… 앤서니 김 부활의 주인공은 딸 밸라
2026년 2월 15일, 호주 애들레이드 그레인지 골프클럽의 18번 홀 그린. 우승을 확정 지은 앤서니 김(41·미국)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승리의 포효가 아닌 ‘뜨거운 흐느낌’이었다. 그는 그린 위로 달려온 네 살배기 딸 밸라(Bella)를 번쩍 안아 올린 채 한참을 울먹였다. 16년 전, 거침없는 샷으로 필드를 장악하던 ‘천재 골퍼’의 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위대한 부활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앤서니 김의 이번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기록의 경신을 넘어선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골프와 절연한 채 암흡기를 보냈던 그를 다시 필드로 불러내고, 결국 정상까지 끌어올린 것은 다름 아닌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기적처럼 찾아온 생명의 힘이었다.
의사들도 포기했던 생명, 기적으로 찾아온 밸라
앤서니 김의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딸 밸라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앤서니 김은 복귀 후 데이비드 페허티와의 심층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약물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전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수많은 수술의 여파로 인해 의사들로부터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은 채 심연 속에 있던 그에게 이 진단은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을 안겨주었다. 앤서니 김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존재 자체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 기적이 찾아왔다. 의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던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2021년 12월 태어난 밸라는 예정일보다 약 3개월이나 일찍 세상에 나온 조산아였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가느다란 호스에 의지한 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작은 생명을 보며, 앤서니 김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몸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싸워 이겨내는 딸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내 안의 악마들과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딸의 사투는 12년간 문을 닫아걸었던 은둔자를 다시 세상 밖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골프공에 새긴 ‘하트 속의 벌’, 0.1%의 확률을 깨다
이번 대회 내내 앤서니 김의 골프공에는 유독 눈에 띄는 마킹이 있었다.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벌(Bee)’ 모양의 그림과 그 주변을 감싼 ‘하트’ 표식이다. 이는 딸 밸라를 위해 그가 직접 그려 넣은 것이다.
앤서니 김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표식이지만, 경기 중 긴장이 되거나 흔들릴 때 공에 그려진 이 그림을 내려다보면 마법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털어놓았다. ‘Bee’는 딸 밸라의 이름에서 따온 애칭이자, 그가 필드 위에 서 있는 이유가 단순히 개인의 영광이 아닌 ‘가족’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강력한 부적이었다. 0.1%라는 희박한 우승 확률을 뚫고 9언더파라는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은 바로 이 작은 표식 속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핑크색 그립과 ‘Girl Dad’의 투혼
복귀 과정에서도 밸라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공백기 동안 골프와 완전히 절연했던 그는 아내가 골프를 배우고 싶어 하자 다시 골프장을 찾았고, 이때 밸라가 사용하는 유아용 골프채의 ‘핑크색 그립’을 보며 다시 클럽을 잡을 용기를 얻었다. 딸에게 포기하지 않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한 동기부여가 그를 다시 연습장으로 이끈 것이다.
복귀 초기 ‘Girl Dad(딸바보 아빠)’라는 문구가 새겨진 스웨터를 입고 출전해 화제를 모았던 그는, 이제 ‘비운의 천재’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희망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16년 전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스윙했다면, 지금의 앤서니 김은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공을 친다.
인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위대한 승리
앤서니 김에게 골프공 위의 ‘하트 속 벌’은 단순한 마킹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어두웠던 시절 자신을 빛으로 이끌어준 딸과의 연결 고리이자, 다시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5795일이라는 기나긴 침묵을 깨고 정상에 선 그는 고통받는 많은 이들에게 “당신도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18번 홀 그린 위에서 딸을 안고 흘린 그의 눈물은 지난 16년의 세월을 씻어내는 정화의 의례와도 같았다.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해 보였던 생명의 탄생과 복귀 우승. 40대의 나이에 다시 시작된 앤서니 김의 골프 인생 2막은 이제 막 첫 번째 정점을 찍었을 뿐이다. 아빠를 깨운 ‘하트 속의 벌’과 함께 이제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