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일, 싱가포르 센토사 골프클럽 탄종코스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 숨 막히는 열대우림의 더위 속에서 호주 출신의 30세 골퍼 해나 그린(Hannah Green)이 또 한 번의 극적인 드라마를 완성했다. 이민지와 11언더파 공동 선두로 마지막 라운드를 출발한 그린은 1번 홀(파4)부터 기분 좋은 버디를 낚으며 출발했다. 흐름이 완전히 바뀐 승부처는 전반 막판 8번 홀(파5)이었다. B컷 페어웨이에서 날린 두 번째 샷이 홀을 살짝 지나 멈춰 섰고, 아쉽게 알바트로스는 놓쳤지만 침착하게 이글 퍼트를 성공시키며 단숨에 2타를 줄였다.
이후 11번 홀과 13번 홀에서 버디를 추가하며 순항하던 그녀는 14번 홀(파4)에서 보기를 범해 이민지에게 2타 차까지 쫓기는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2024년 이 대회 챔피언이기도 한 서른 살의 베테랑 그린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어진 15번 홀(파3) 프린지에서 시도한 퍼트가 그대로 컵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실상 승부에 쐐기를 박는 환상적인 쐐기 버디를 만들어냈다. 최종 합계 14언더파 274타로 맹렬하게 추격해 온 미국의 오스턴 김(13언더파)을 1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 상금 45만 달러(약 6억 4000만 원)의 주인공이자 개인 통산 7승째를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결혼 후 모든 게 잘 풀린다”… 2024년 3승을 휩쓴 마법의 시작
아시아 투어에서 유독 강한 해나 그린의 압도적인 맹활약은 2024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12월생인 그녀는 2012년부터 교제해 온 동갑내기 호주 투어 출신 프로 골퍼 제러드 펠턴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심리적 안정감을 찾은 그린은 “1월에 결혼한 이후로 모든 게 잘 풀린 덕분이다”라고 밝힐 만큼 놀라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2024년 3월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4월 JM 이글 LA 챔피언십에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그리고 28세였던 같은 해 10월, 한국 경기도 파주의 서원힐스 코스에서 열린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최종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셀린 부티에를 1타 차로 따돌리고 시즌 3승째를 수확했다. 1라운드부터 단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은 완벽한 ‘와이어 투 와이어(wire to wire)’ 우승이었다. 호주 선수가 LPGA 투어에서 단일 시즌 3승을 거둔 것은 2006년 그녀의 우상이자 멘토인 캐리 웹 이후 처음 있는 대기록이었다.
비거리의 약점을 지우는 마법의 숏게임, 1위의 퍼팅 감각
해나 그린의 플레이 스타일을 분석해 보면 그녀의 강점과 약점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녀는 투어에서 상위권의 장타를 치는 선수가 아니다. 실제로 2024년 시즌 기준 장타 부문 60위(평균 262.80야드)에 머물렀으며, 그린 적중률 역시 21위(72.68%)로 샷만 놓고 보면 압도적이라 부르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무기는 홀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린은 ‘그린 적중 시 퍼트 수’ 1위(1.75개)를 기록할 정도로 투어 최고의 퍼팅 실력을 자랑한다. 비거리가 짧아 먼 거리에서 그린을 공략해야 하는 불리함을, 환상적인 숏게임과 원퍼트 마무리로 완벽하게 상쇄하는 것이다. 또한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하며 타수를 잃지 않는 ‘지키는 골프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최대 장점이다.

냉철한 방어 속에 숨겨진 야수성: 100만 달러의 공격적인 승부사
수비적인 골프를 할 줄 안다고 해서 그녀가 소극적인 선수는 결코 아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린은 누구보다 공격적이고 계산된 모험을 즐기는 승부사로 변모한다. 이러한 그녀의 성향은 2021년 ‘에이온 리스크 리워드 챌린지(Aon Risk Reward Challenge)’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투어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까다롭고 중요한 홀들을 지정해 1년간 가장 낮은 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100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이 대회에서, 그린은 지정 홀의 무려 72%에서 버디를 잡아내고 단 한 번의 보기도 범하지 않는 완벽한 공격성을 과시하며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코스에 나가면 공격적으로 임하려고 노력하며, 그곳이 제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100만 달러 보너스 1위를 확정 짓기 위해 시즌 막판 펠리컨 위민스 챔피언십 출전을 포기하는 과감한 전략적 결단도 서슴지 않았다.
5주 만의 스윙 전면 개조와 슬럼프를 극복한 마인드셋
강인한 내면과 집념은 30세의 챔피언을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다. 1996년생인 그녀가 22세의 어린 나이로 2019년 메이저 대회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1타 차로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 그녀의 멘토인 캐리 웹은 대회 기간 함께 지내며 그린의 대범함을 목격했다. 대회 마지막 날 밤, 천둥 번개가 치며 집이 흔들릴 정도의 큰 폭풍우가 몰아쳤음에도 미동도 없이 숙면을 취하는 그린을 보며 웹은 그녀가 큰 무대 체질임을 직감했다.
메이저 우승으로 5년간의 투어 출전권을 확보하며 안주할 수 있었지만, 그린은 우승 바로 다음 날 코치와 함께 그립부터 스탠스까지 스윙 전체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전면 재조정(total redo)’에 돌입했다. 기존 스윙으로는 정신적으로 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단 5주 만에 새로운 스윙을 장착해 직후 열린 캄비아 포틀랜드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챔피언의 자격을 증명했다.
이후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스포츠 심리학자를 찾아가 멘탈을 바꾸며 약점을 극복했다. 샷이 안 될 때 무의식적으로 클럽을 들고 걸어가며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던 나쁜 습관을 깨닫고, 샷 직후 곧바로 캐디에게 클럽을 넘겨버리는 긍정적인 ‘포스트 샷 루틴’을 훈련하며 스스로의 뇌를 긍정적으로 훈련해 냈다.
다음 세대를 향한 롤모델, 진화하는 30대의 아시아 여왕
2024년 동갑내기 남편과의 결혼을 기점으로 기량이 만개한 해나 그린은 30세가 된 2026년 3월 싱가포르에서의 통산 7번째 우승으로 이어지며 자신의 ‘제2의 전성기’가 현재 진행형임을 확실히 입증했다. 자신의 멘토였던 캐리 웹의 장학생으로 시작해 세계 정상에 선 그녀는, 이제 경기장에서 어린 소녀들을 볼 때면 먼저 다가가 미소를 짓고 하이파이브를 건네는 롤모델이 되었다.
압도적인 장타력 대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교한 퍼팅과 승부처를 꿰뚫는 대담함, 그리고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30세의 해나 그린. 아시아 필드를 제패한 여왕의 클럽 끝에서 앞으로 또 어떤 기적 같은 스토리가 쓰일지 궁금하다.
